익사일 放逐, 2006 - 홍콩 누아르가 다다를 수 있는, 어느 극점
 
 장르는 저마다의 공식을 지닌다. 그 공식을 품고 시작한 한 편의 영화가 어느 순간엔가, 그 지점에서 한층 더 나아가 순수하리만치 극단적으로 장르에 대해 충성을 바칠 때, 그 순간 스크린과 관객 사이엔 그 어떤 설명도, 논리도 필요하지 않다. 그건 이미 이 게임의 규칙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는 이들간의 짜고치는 고스톱이다. 저쪽에서 너무하리만치 딱 맞아떨어진 패를 내보여버리면, 이쪽에선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는 없는 일 아닌가. 어지간해선 열에 아홉은 클리셰란 단어로 일축되고 말 그 패가 간혹, 어느 장인의 솜씨와 더불어 우연을 넘어서는 필연과 만나는 바로 그 순간, 스크린 위에선 매혹의 순간들이 펼쳐진다. 그건 어떤 말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장르만의 기적이다. 가장 완벽한 공간 속 더없이 적절하게 배치된 캐릭터들을 수직 수평으로 잇는 달리숏과, 그 찰나들을 담아내는 고속으로 촬영된 움직임들이 필름 속 어느 순간에서 만날 때, 영화는 비로소 그 영상만으로 하나의 언어가 된다.  

 우리는 홍콩 누아르란 장르를 보며 말로 설명이 가능한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다. 긴 코트자락으로 몸을 감싼 사내들이 선글라스 너머 담배연기를 피워올리며, 쌍권총을 거머쥔 채 오로지 강호의 의리와 협객간의 우정을 위해 피를 뿜으며 죽어갈 때, 우리는 그 순간에 저 친구들 꼭 저렇게까지는 안해도 됐을 낀데-란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건 이 게임의 근본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반칙 중의 반칙이다. 아무리 쏘아대도 절대 탄환이 떨어지는 일 없는 신묘한 쌍권총과 수십방 총에 맞아 선지가 줄줄 배어나오면서도 볼일은 다 본 후에야 죽고 마는 인간 터미네이터들을 보면서도 묵인하는 건, 그걸 인정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어떤 장르의 쾌감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죽음을 위해 총을 빼들고 믿는 바 무엇을 위해 스러져간다. 홍콩 누아르의 세계가 그토록 예찬하는, 그 숭고하리만치 장렬하게 묘사되는 순간들. 그 순간에 있어서만큼은 다른 어떤 말 같은 것이 끼어들 구석이란 없다. 그저, 그 비할 데 없는 영화적 감흥의 절정에 흠뻑 젖어드는 것 뿐.    


 오우삼이 떠나가고 시간이 흘러가며 한순간 모든 것을 태워버린 것만 같던 홍콩 누아르의 땅에 남은, 마지막 장인 두기봉. 팔십년대부터 이미 수십여 편에 달하는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던 중 그는 한순간에 어떤 영화적 해탈 같은 것을 맞이한 듯 하다. '익사일'은 장르를 다루는 이 장인의 내공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여주는, 홍콩 누아르란 장르가 도달한 어떤 극점과도 같은 영화다. 그가 전작 '대사건'과 같은 작품에서 그랬듯, 그는 시나리오상의 사소한 헛점 같은 것엔 신경쓰지 않는 듯하다. 대신에 더없이 홍콩 누아르다운 정서와 스타일을 앞세우고는 그저 우직하게 밀어붙인다. 그 힘으로 관객을 스크린 속에 완전히 빠뜨려버리고는 약간의 논리적 비약 정도야 니들이 알아서 생각하란 듯 훌쩍 넘겨버린다. 이야기의 힘을 믿는 이의 대범함!! 가히 경지에 올랐다 할만한 카메라 워킹과 가장 뻔한 장면들에서조차 그림을 뽑아내는 액션 안무가 어느새 헐거운 이야기의 이음새를 메꾼다. 페킨파에서 오우삼을 이어 수혈받은 고속촬영과 교차편집이 만들어내는, 찰나의 더없이 매혹적인 확장. 그런데 두기봉은 여기서 단순히 그 유산들만을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세계 속에 활극과 웨스턴의 요소들마저 끌어들인다. '익사일'이 여태껏 익히 보아오던 홍콩 누아르를 한발짝 넘어서는 감흥을 전해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레오네풍의 황야에서 총기로 벌이는 하나의 농담,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들을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들의 과장된 제스쳐. 장르와 국가는 제각각 다르지만 기본적인 하나의 정서를 공유한 사내들의 세계를 하나로 모으면서, 이 영화는 장르의 틀에서 한발짝 더 나아간다. 여태껏 홍콩 누아르가 특유의 넘쳐나는 정서를 한술 더 뜨는 -명백히 장르의 급소라 할 만한-과도한 대사들로 풀어냈다면, '익사일'은 여기저기서 빌려온 모든 장르의 규범들을 펼쳐놓는 방식으로 그 과잉을 최대한 덮어내는 것이다. 직부감에서 훑어내려오는 네 사내의 포샷으로, 아무 말 없이 맞추는 탄창 속 총알의 수로, 황야 위의 네 명을 잇는 트랙킹으로, 그리고, 하모니카와 담배와 맥주캔과 선글라스로. 적재적소에서 대사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장르의 요소들로. 말은 줄어들고 '말이 필요없는' 순간들은 늘어난다. 그것이야말로 장르영화가 해낼 수 있는 최고의 성취가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익사일'은, 죽어가는 사내들에 대한 예찬이며 잊혀져가는 것에 대한 향수이다. 페킨파가 서부 사나이들을 낭만으로 추모하고 레오네가 서부의 죽음을 한편 서사시로 노래했듯, 두기봉 역시 더 이상 강호에 설 자리 없이 사라져가는 협객들을 비애에 찬 눈으로 바라본다. 'exiled'라는 영제가 말하듯 - 이 역시 세상에서 밀려난 채, 추방당한 채 스스로의 믿는 바를 지키며 죽어가는 떠돌이들에 대한 만가 한 곡조이다.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이 지독하게도 시대착오적인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는 없다. '익사일'은 시간이 지나면 그 어느 고전 못지않은 클래식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렇게 이 장르의 최극단에 선 영화가 노래하는 비가란 한순간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닌, 계속 이어지는 것이니까. 사내들은 죽어도, 그 선율은 남는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을 장식하는, 한 장의 흑백 사진처럼.   
  

2007.07.
       by wideawake
by wideawake | 2007/07/09 03:12 | cinema | 트랙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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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SabBatH at 2007/11/08 23:48

제목 : [방축(放·逐, 2006)]
 [방축]의 첫 총격 액션 장면에는 세 사람이 있다. 아화, 화, 아태. 아화는 이제 막 집에 돌아왔고, 화는 아화를 죽이려고 왔고, 아태는 아화를 살리려고 왔다. 화가 총을 꺼내 아화를 겨누고, 아태가 총을 꺼내 화를 겨눈 상태에서, 아화는 서랍을 열고 자신의 6연발 권총을 꺼낸다. 아화는 총알을 집어 보란 듯이 하나씩 장전한다. 그 모습을 본 화는 자신의 총에서 탄창을 꺼내 아화가 한 발 장전할 때마다 자신의 총알을 하나씩 빼낸다. 그리고 ......more

Commented by at 2007/07/28 15:27
홍콩영화 하니까 한가지 소식이 떠오르는군
「욕망, 신중(色, 戒)」이 9월달에 미국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한다는 소식도 있던데...

아무튼 자네가 좋아하는 이안 감독과
내가 좋아하는 가수 왕력굉의 조합이 만들어낸 영화라는 점ㅋㅋ
Commented by wideawake at 2007/08/19 00:27
뢈/ 이안 신작 찍는단 얘긴 들어본것 같은데...
왕력굉이란 분은 당췌 누군지 모르겠군;;

뭐 이안 정도의 지명도면 국내개봉도 반드시 하리라고 본다. 전후사정 다 제끼고 일단 기대하자.
Commented by stonebe at 2007/08/21 01:47
너가 이런 글 쓰고 나면 '익사일'에 관해서 쓸 얘기가 없잖아!



Commented by wideawake at 2007/10/25 15:40
stonebe/백만년만의 댓글이네요.

그 감동의 단관 이후로 어째 뵐 기회가 없네요 형님. 잘 지내시는지.
충무로 영화제에서 만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여름 이후 '익사일'에 필적할 영화를 만나지 못하고 있네요.
그 계절만 지나면 좀 나아지겠거니 했는데, 공익성 만성피로인지 원.
무더운 종로거리를 지나 필름포럼에 앉아 영화를 기다리던 그때가, 지금은 오히려 그립습니다. 어째 디비디 소식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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