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위한 나라는 없다-cgv 무비꼴라쥬, 다양함이라는 허상
 오래도록 기다리던 영화와 만나는 날은 설레임의 연속이다. 읽기를 아껴두었던 관련 기사를 챙겨들고, 과연 어떤 풍경과 마주하게 될 것인가, 머릿속에 펼쳐보길 멈출 수가 없다. 전날 복습했던 예고편 속 한장면을 되뇌며, 하루가 아무리 힘들고 길지언정 그마저 축제 전의 준비과정일 뿐이다. 같은 마음으로 이날을 기다려온 동지와 함께한다면 더욱 좋겠다. 시간을 기다리며 간단히 밥 한끼도 좋고, 관람 후의 흥분을 한잔 술과 불면의 밤으로 이어가도 좋다. 스크린에 펼쳐질 그 광경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그렇게 기다린 영화를 위해 영화관을 찾은 관객에게 영화를 빼앗아가는 것은 그 모든 기쁨을 빼앗는 것이다. 단지 백이십분여 시간 이상의, 하루를, 혹은 며칠간을, 아니, 어쩌면 평생을 사로잡을지도 모를 체험을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오늘 압구정 cgv에서 예정되어 있었던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무비꼴라쥬 멤버십 시사회가 딱 그런 경우였다. cgv는 언제부턴가 무비꼴라쥬란 이름으로 몇 개 상영관엔가 인디영화의 화제작들을 조금씩 걸기 시작했다. 멀티플렉스라고 돈 되는 영화만 까는 거 아니에요, 우리도 영화의 다양함을 사랑한답니다-정도의 취지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가 싶은데, 문제는 이 무비꼴라쥬인지 꼴라쥐인지가 조금만 파고 들어가보면 꼬라지가 영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무비꼴라쥬의 이름 아래 개봉한 영화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현재 오로지 씨지비에서만 배급중인 이 작품은 서울 시내 단 여섯개 관에서만 볼 수 있고, 강변 cgv같은 경우 무비 꼴라쥬는 80석 내외의 아담한 4관에서만 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영화의 황량한 씨네마스코프를 가장 괜찮게 보려면 용산 cgv로 가야 하는데, 여긴 가장 장사 잘 되는 시간대인 6시부터 10시까지는 무비꼴라쥬가 아예 꼴라주되지 않아버린다. 그나마 영화가 아카데미 4개부문을 휩쓸어간 후 시간대를 좀 늘린 분위기다만, 만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가 수상에 실패했다면? 더욱 작고 팔리기 힘든 영화였다면? 그건 그렇다쳐도 오늘 경우는 좀 경우가 없었지 싶다. 어떻게 15석 준비해놓고 아무 공지도 없이 백여명 넘는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리는 걸 보고만 있을 수가 있나. 태도도 태도지만 15석이란 숫자가 할 말을 잃게 한다. 그 시간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몇 시간 전부터 '데어 윌 비 블러드' 를 위해 기다렸다. 말하자면 cgv에게 있어서 그 가치란 15석 정도라는 거겠지. '다양성'이란 기치를 내세우며 그럴듯한 이미지만 낼름 팔아먹고 정작 영화는 뒷전인 꼴이다. 간단한 논리다. 15석이란, 아무래도 돈이 되는 숫자는 아니니까.      
 
 어쨌든 3월 6일은 올 것이고 '데어 윌 비 블러드'는 개봉할 것이다. 그래도 이걸 영화관에서 보는 게 어디야, 하며 닥치고 있어야 할까? 멀티플렉스를 점령한 블록버스터들이 그럴 기회조차 쓸어가는 걸 너무 많이 보아 왔다. 이래서는 언젠가 우리 생애에 다시 보기 힘들 명화가 찾아왔다 어느샌가 사라져도, 그걸 일주일 안에 깨닫지 못하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기본적으로 영화가 돈에 움직이는 예술이란 건 부정하지 않겠다. 다만, 영화란 것이 칠천원을 지불하고 두어시간쯤 소비하는 순간들이 다가 아니었으면 한다. 관객에게 열다섯석쯤만 열려있는 가능성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영화란 그렇게 쉽게 끝장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데어 윌 비 블러드' 를 보기 위해 몇 시간 전부터 줄을 섰던 사람들의 분노만큼이나.   
 돈이 될 만한 영화가 아니라 해서 관객을 두고 허투른 약속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좋은 영화를 좋은 상영관에서 볼 수 있는 것. 너무도 당연해야 할 사실들이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 그게 안타깝다.


2008.02
by wideawake
by wideawake | 2008/02/27 00:19 | cinema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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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ArborDay at 2008/02/27 02:42
겉으로는 다양성을 내세우지만, 결국은 좋은 영화를 볼 기회를 막아버리는 횡포에요. 전 그냥 DVD로 만족하며 살면서, 극장관람은 덤이다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게 맘이 편하대요.
Commented by ^^ at 2008/02/27 09:10
우와, 어제 저와 같은 곳에 계셨군요;;
저도 어제 여기 보러 갔다가;;
다른 영화로 대체해준다고 해서.. 평이 좋다고 들었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봤거든요~
근데 좀 너무 잔인한 느낌이;;
아직 잘 이해가 안 되용~;;
Commented at 2008/02/27 09:4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술과고기 at 2008/02/27 09:56
우리나라는 영화뿐만이 아닌것 같아요. 음악 미술 뭐 하여튼 전반적으로 다 그런 것 같아요. 너무 꽉 막혀 있어서 답답해요.
Commented by 아노말로칼리스 at 2008/02/27 10:34
우리 사회는 돈이 되는 예술만을 사랑합니다.

돈이 안되면 "그들"에겐 그저 쓰레기일뿐이죠.
Commented by wideawake at 2008/03/05 09:49
Aborday 님/ 그게 맘이 편하긴 한데 또 생각할수록 화난단 말이죠. 저는 (안타깝게도) '폭력의 역사' 같은 걸작을 모니터 앞에 앉아 보고는 그만 멍해져서, 이걸 제대로 된 극장 스크린으로 처음 봤다면 어떨까 애꿏은 모니터만 노려보곤 합니다. 나중에 개봉했을때 보긴 했지만 영화란게 참 처음 볼 때가 중요한 법인데 말이에요. '시가렛 번' 에 등장하던 갑부처럼 집에다 극장 차려놓고 필름 수집해서 볼 수도 없고 참.

^^ 님/ 아마 그날 예정대로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보셨어도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저도 '노인...'을 몇번 봤지만 아직 이 영화를 제대로 받아들이질 못한 것 같아서 한번 더 보려고요. 뭐 이정도 쟁쟁한 걸작들은 좀 이해 안되주고 하는 맛이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단숨에 이해되버리면 재미없겠지요.
Commented by wideawake at 2008/03/05 10:04
술과 고기 님/막혀 있는 것도 막혀 있는 거지만, 정말 상도의상으로도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경우엔 황당할 뿐이죠.

아노말로칼리스 님/ 일들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사실 조금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 합니다.
다만 조금만 방법을 찾아보면 '돈 안되는 것'들도 어느 정도 '돈 되는 것'들 사이에서 나름 돈도 되면서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 듯 한데 말입니다. 제 무리한 생각일려나요. 여튼 아쉬울 뿐입니다.
Commented by wideawake at 2008/03/05 14:48
비공개 님/ 어이쿠 업계 관계자님이 오셨군요;;
사실 저도 교차상영 정도는 그나마 감지덕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이 글의 요지는 그날 압구정에서의 말도 안 되는 사태를 투덜거리기 정도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좀 얘기가 커진 감이 있네요. 다만 '2회차 열어도 보러 갈 사람' 으로서 한 말씀 드리자면 시간까진 좋으니 좀 괜찮은 상영관에 걸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특정 영화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고요, 예컨대 '주노'같이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영화야 아담한 상영관에서 몇 안되는 관객끼리 올망졸망 웃으면서 보는 맛도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노인...'이나 '데어 윌 비 블러드' 같이 널찍하고 황향한 풍경 속에서 불도 좀 나고 사람도 죽고 차도 좀 부서지고 하는 동작이 큼직한 영화들은 그만큼 넓은 스크린에서 봤으면 하는 바램입니다....는 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안타까움이고요. 여튼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paper cup at 2008/03/23 15:24
난 데어 윌비 블러드 모니터 앞에서 봤수다
cgv는 망할 새끼들이지만 이 시대에 영화관람에 사치란 가치는 분명 생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영화보는 눈이지 뭐..
난 모니터에서 본 게 아쉬웠지만 모니터 째려볼 일은 아니었다고 보우
Commented by wideawake at 2008/04/23 11:07
paper cup/ 왜 오는 사람마다 모니터로 피를 보는겐가.

헌데 정말 영화관가서 영화보면 사치가 되는 때가 언젠가 올까?




그리고 우리학교 방화벽 막혀있어서 네 블로그 덧글달기가 안되는 사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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