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이나타운' 의 사악한 늙은 악마는 무력한 사내를 향해 탐욕스럽게 느물거린다. 어찌해볼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고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 사립탐정, 그리고 그 거대하게 흘러가는 순리를, 선(善)이니 의지니 하는 말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세상 그 자체인 노아 크로스를 연기하는데 존 휴스턴만큼 어울리는 이가 또 있었을까. 당시 영화계 역사에 드리운 그런 움직일 수 없는 존재감 덕에 감독 로만 폴란스키도 그를 캐스팅했던 게 아닐까. 당시 폴란스키 자신이 기껏해야 주인공 코나 베며 공갈협박이나 늘어놓는 양아치라면, 존 휴스턴의 관록과 고집으로 뒤틀린 주름진 얼굴은 바로 차이나타운 그 자체였던 것이리라. 바로 그 숙명의 감독, '존 휴스턴 회고전' 이 아트시네마에 찾아온다. 굳이 필모그래피를 되짚어 볼 것도 없이, 휴스턴이란 이름을 발음하는 순간 그건 그 자체로 어떤 영화들을 대표하는 고유명사다. 거대한 도시 사이로 깊게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중절모를 쓰고 담배를 꼬나문채 권총을 든 사내들. 잠깐, 그런 건 쌔고쌘 여느 범죄영화들에서도 볼 수 있지 않느냐고? 아니, 보통 범죄 그 자체를 묘사하거나 그 속 인물들의 비장함만을 그리는 데서 그치기 쉬운 이 분야의 범작들보다, 그의 영화 속 사내들은 속세의 번잡함 속에 훨씬 더 가까이 있는 인물들이다. '카사블랑카' 나 '빅 슬립' 등의 영화들에서 더없는 나이스 가이로 등장하는 미남 스타 험프리 보가트조차, 휴스턴의 영화 속에서는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없는 비열함이 묻어난다. '말타의 매' 에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키스를 나누던 여인에게 선고를 내리듯 뱉던 말들, 혹은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 속 황금에 눈이 멀어 동료를 배신하고 더없이 비루하게 죽어가는 그를 떠올려 보라. 그정도 되는 주인공을 그토록 무심하게 운명 앞에 내팽개쳐놓는 영화도 드물 것이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욕망에 빠져 일을 그르치거나, 혹은 스스로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다고 굳게 믿지만 결국 흘러가는 운명 속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이들. 존 휴스턴은 그 어느 감독보다 큰 장르의 줄기 속에서 그 인물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그려내는 데 능했다. 큰 필치는 크고 거침없이 다루되, 세세한 것 한가지도 놓침없이. 그래서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을 지켜보는 것은 무척이나 묘한 체험이 된다. 분명히 거창한 일을 하는 대단한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들이, 어느 순간 바로 우리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이다. 일단은 예전부터 보고 싶었지만 어째 볼 기회가 없던 험프리 보가트 형님의 '아프리카의 여왕', '비트 더 데블' 이라던가 오손 웰즈, 피터 셀러스, 윌리암 홀덴,...까지는 그래도 알겠는데 여기에 장 폴 벨몽도에다 우디 알렌이라는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출연진만으로 항상 '이건 당췌 뭐하는 놈들인가' 싶은 호기심을 지울 수 없던 '카지노 로얄' 등등이 눈에 들어오지만, 역시 '아스팔트 정글', '팻 시티' 등을 위시한 이름만으로 이미 가슴 설레는 누아르들의 시꺼먼 세계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는 데야, 특히나 그중에서도 가장 기대하는 작품이 '팻 시티' 이다. 아직 보지도 못했으면서 이상하게도 이 영화가 제목만으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건, 아마 작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때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특강 중 들었던 소개 때문이리라.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영화들을 열거하면서 기요시는 특히 이 작품을 놓고 줄거리를 이리저리 이야기하다 영화의 결말을 묘사하며 그 결말의 방식이 자신에게 준 충격을 털어놓았다. 그건 영화를 직접 본 이의 감상을 넘어서 그걸 말로 듣는 이에게까지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겨놓는, 어떤 강렬함에 대한 고백이었다. 2008.03
by wideaw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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