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대리인 妄想代理人, 2004 - 콘 사토시의 모든 것
 이 무시무시한 13화짜리 애니메이션을 뭐라 한마디로 말할 수 있을까. 현실의 극단까지 내몰려진 사람은 망상 속에서. 스스로 구원이라 착각하는 도피처를 찾으려 한다. 그것은 이 현대사회 속, 현대인이란 이름을 단 인간이란 존재 모두에게 찾아든다. 야구모자에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평범한 이웃집 소년처럼, 광기처럼 퍼져나가는 유행 캐릭터의 인기처럼, 현실과 망상 사이의 모호한 틈에서 폭주하는 인간 정신의 검은 홍수처럼.   

 콘 사토시란 감독을 주목하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올해 최고의 수확이라 할 만하다. 예전부터 그의 작품들에 대해선 들어 왔지만 그 감독의 이름을 각인받게 된 것은 피프에서였다. 유난히도 영화 운이 없었던 올해 부산에서 곱절의 충격이었던 애니메이션 파프리카. 그 한편이 던져준 메시지 덕에 나는 한번 떠나가 버렸던 셀 위의 세계로 돌아왔고, 그제야 미래의 영상물이란 프레임 단위 연출의 세계가 될 것이라던 누군가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실사 영화 연출을 공부하다 애니메이션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콘 사토시(정말 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영화 연출에 대해 한번이라도 고민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이지 입을 딱 벌리고 말 절묘한 순간들로 가득하다. 실사의 인물들과 어딘지 다르면서도 묘하게 비슷한 캐릭터 작화를 바탕으로, 그는 초반엔 실사 영화들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연출로 극을 시작한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며 대부분 끝없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던 혹은 여러 세계를 숨가쁘게 오가던 그 속의 인물들이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얘기는 달라진다. 그건 장풍을 쏘며 하늘을 나는, 만화적 상상력이 지배하는 세계와는 다르다. 그것은 이 세계의, 어디까지나 중력이 작용하는 이 세상 위에 발을 디딘 채로, 거기서 조금 더 발돋움하려 애쓰는 상상력이 가 닿을 수 있는 어떤 지점이다. 퍼펙트 블루에서 여배우가 추격하던 자신의 환상이 도심을 뛰놀다 가로등 위로 사뿐히 날아오를 때, 동경 대부에서 아기를 품고 고층빌딩 끄트머리에서 미끄러지던 주인공에게 기적처럼 도심의 강풍이 불어올 때, 파프리카에서 TV뉴스의 영상 속으로 뛰어든 탐정이 현장의 카메라 속에서 빠져나올 때, 세상 어느 영화 감독이 이 그림 속 세상의 자유로움에 부러움을 표시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영화가 한번쯤은 발꿈치를 있는 대로 들어보지만, 여간해선 저려오는 발 덕에 포기하고 마는, 현실과 스크린 사이 환상의 한없이 얇디얇으며 끝없이 두터운 경계인 것이다.

 망상대리인에는 그야말로 그러한 표현 방식들로 가득하다. 그의 인간 정신세계를 다루는 작품들이 그렇듯 일단 읽을거리들이 꽉꽉 들어차 있다. 프로이트와 라깡과 지젝이 한데 모여 파프리카와 이 작품만 가지고 토론의 장을 벌인대도 몇날 며칠동안 할 얘기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굳이 심리학의 세계와 인간 정신에 대한 고찰을 들이대지 않는대도, 우리는 그것 이상으로 이 세계가 펼쳐내는 이미지들에 집중하기에도 충분히 바쁠 것이다. 스릴러와 공포 장르의 문법에 충실한 컷의 전개는 이 장르의 영화쪽 최고수들도 한수 접고 들어와야 할 만큼 교과서적인 솜씨를 보여준다. 거기에 덧붙여 콘 사토시는 그 최고수들이 질투로 돌아버릴만한 연출들을 절묘하게 쏟아붓는다. 세상에, 아무리 헤어조크만큼 미친 놈이라도 장마철 범람한 개천에 소녀와 할머니를 처박을 수 있을까. 혹은, 어디 제임스 카메론쯤 된다 해도 검은 물줄기로 폭주한 정신세계가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장면을 필름 위에 옮길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테리 길리엄쯤 되는 몽상가라도 덮쳐오는 위험에 거리가 어둠에 덮이는 장면을 그럴듯하게 만들려면 고민깨나 해야할 것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 모든 영화와의 비교는 이 세계가 기본적으로 철저하게 실사 세계에 발을 디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실사에 기반한 세계가 허구에 기반한 상상과 만날 때, 그 교차점은 두 근원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함직한 짜릿함을 선사한다. 망상대리인은 그런 애니메이션이다. 그리고 콘 사토시는 그런 감독이다.

 이 정도면 소개는 충분히 되었으리라 본다. 영화든 애니메이션이든, 어느 한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중에서도 영화를 좋아하는 당신에게 특히 추천한다. 당신이 여태껏 카메라 속 세상에서 한번쯤 상상해보았지만 볼 수 없었던, 그런 지점에 가 닿는 셀 위의 세계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2006.12.12
 by wideawake
       

by wideawake | 2006/12/13 00:30 | cinema | 트랙백(1)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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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한페이지리뷰 at 2007/02/28 09:15

제목 : 망상대리인 (콘 사토시)
졸린 눈 부비며 일어난 아침부터 한페이지 단편소설 회원님들께 권해주고 싶은 작품을 잡기적으로 쓰느라 자리에 앉는다. 권하고자 하는 작품은 콘 사토시 감독의 '망상대리인'. 총 13화 완결된 TV 시리즈로, 이미 '천년여우'나 '퍼펙트 블루'와 같은 작품에서 현실과 환상의 넘나듦을 주축으로 하는 그의 작품 세계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다만,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는 약간 오버인 점도 있으니, TV 방영용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오히려 '천년여우'가 ......more

Commented by oIHLo at 2006/12/13 01:31
좋죠 이 시리즈.
그런데 문제가... 이 감독의 영화는 세 편을 봤는데 <천년여우>, <파프리카> 그리고 이거였거든요?
그런데 가장 최근에 만든 두 편이 다 클라이막스에서 '괴수대결전'으로 가는건지 -_-;;;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12/13 01:40
[퍼펙트블루]는 정말 그림의 느낌이 아니라, 일종의 강박적인 카메라의 느낌이 물씬 배어 나오더군요.
그의 작품 중 저같은 공포영화 매니아들에게 특히 지지받는 작품이죠.
아차, 저도 콘 사토시 감독 아주 좋아합니다. [망상대리인], [천년여우]도 물론.

아직 기회가 닿지 않아서 [파프리카]를 못 봤는데, 꼭 봐야할 것이 하나(뿐만은 아니지만) 남아있는 기분이라 참 즐겁습니다!!
Commented by wideawake at 2006/12/13 01:45
oIHLo/그렇잖아도 저 가히 묵시록적이라 할 결말 방식은 파프리카에서 다시 써먹었더군요;
뭐, 감독이란 결국 평생 한 가지 얘기만 하고 또 할 수 밖에 없다잖아요. 숏컷이나 매그놀리아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저런 짓까진 못할테니, 저런 걸 두번쯤 써먹어도 그러려니 하죠 뭐. 다음엔 과연 어떨지 :)
이 감독이 맘에 드신다면 퍼펙트 블루도 추천입니다. 이건 막판에 그렇게까지 막나가지 않아요
Commented by wideawake at 2006/12/13 01:54
ArborDay/ 퍼펙트 블루 정말 걸작이더군요. 사실 중학교시절엔가 친구한테 이걸 불법 VCD로 빌린 적이 있었는데 그땐 야한 부분만 대충 보고 돌려줬던 기억이(으하하);; 뭐, 그때야 봤더라도 그냥 괜찮은 스릴러구나 하고 지나쳤을 것 같습니다. 영화 카메라가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이해하고 난 다음에야 이 작품의 무시무시함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게 아닐런지.

파프리카는 올해 부산에서 봤는데, 정말 최고라고밖에는!! 영화 보러 간 부산에서 최고의 수확이 애니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국내 개봉 얘기는 아직 들리지 않지만, 만일 극장에 걸린다면 스크린으로 두번은 더 볼 용의가 있습니다. 기다림을 맘껏 즐거워하셔도 좋을 듯.
Commented by 충격 at 2006/12/13 06:51
퍼펙트 블루가 최적의 밸런스였다는 생각입니다.
요컨데 박찬욱에게 있어서의 올드보이랄까요.
대중성과 작가성의 줄타기에 있어서 가장 신묘한 지점.

천년여우에서는 좀 너무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다가,
망상대리인 후반부에서는 폭주하는 걸로 보이더군요.
대중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나간 느낌.

망상대리인은 개인적으로도 그다지 재밌게 보지는 못했는데...
워낙 피곤에 찌들어있던 시기에 감상했기도 해서
(이 시기에 본 것 중 좋게 느낀 것이 별로 없... 역시 컨디션은 중요합니다.)
언제 한번 다시 봐야겠단 생각은 듭니다.
DVD 최종권에는 음성해설도 들어있으니 들어봐야겠고요.
가져다놓고 본편에 다소 실망해서 보류한 상태로 2년 정도 흘러버렸네요. (......)
(하기사 사놓고 서플 다 못본 것이 한두개도 아닙니다만서도... 백단위;;)
Commented by wideawake at 2006/12/16 17:04
충격/ 확실히 퍼펙트 블루가 그 신묘한 지점을 포착하고 있었단 점은 인정합니다만, 글쎄요. 본작에서나 파프리카의 그 묵시록을 연상케 하는 결말 또한 딱히 비대중적이란 느낌은 들지 않는군요. 셀 위에서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데 현실은 현실 환상은 환상. 이걸로 끝. 하고 딱 맺어버리면 너무 심심하잖아요. 애니메이션이라면 이정도는 막나가줘야지!! 란 기분이랄까요

확실히 감상에 있어서 컨디션은 중요하지요. 꼭 한번 다시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저도 밀린 서플들 보긴 봐야 할텐데...
Commented by 보고싶다ㅠ.ㅠ at 2007/02/10 11:37
아... 파프리카 정말 보고싶당;;; 국내에는 언제 개봉하나요...??
퍼펙트 블루는 정말 최고라는!!!
Commented by wideawake at 2007/02/17 15:40
보고싶다ㅠ.ㅠ/아쉽게도 국내 개봉 소식은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사실 멀티플렉스 같은데 걸리기엔 좀 막나가는 애니메이션이죠;; 저도 부산에서 두번 봐둘걸 하고 후회하고 있지요(;;)
Commented by Anesthetic at 2007/03/03 10:06
아, 퍼펙트블루 감독 작품인가 보네요. 기회되면 한번 챙겨봐야지.
Commented by wideawake at 2007/03/08 00:14
Anesthetic 님/ '퍼펙트 블루'만큼 탄탄하면서 몇 배쯤 막나가고 몇 배쯤 대책없습니다. 꼭 한번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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